안녕하세요, 여러분. 워디랩스 지니입니다. 요며칠 시원하게 쏟아지는 비에 오랫동안 우리를 답답하게 붙잡았던 갈증이 조금이나마 해소되는것 같습니다. 이제 이 짧은 장마가 지나가면 숨이 턱턱 막힐, 본격적인 여름날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겠지요.
엄청난 여름 햇살을 볼때마다 저는 10년 전에 떠났던 스페인 순례자의 길을 떠올립니다. ‘카미노’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한, 프랑스 남부 끝자락에서 출발하여 스페인 서쪽 끝 산티아고까지 800km에 이르는 길인데 (산티아고까지 가는 루트는 10개가 넘는데, 이 프랑스 루트가 가장 많이 알려져있습니다), 정식 명칭은 ‘카미노 데 산티아고, Camino de Santiago’ 즉 ‘산티아고로 이르는 길’이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강렬했던 스페인의 태양만큼이나 제 인생에 미친 영향이 컸기에 해마다 7월이면 아련한 첫사랑처럼 저의 시간에 파고듭니다. 사실 떠날때 특별한 기대를 하고 간것도 아니었고, 800km길을 다 걷고나서도 뭐 대단한 깨달음을 갖게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복잡한 생각들로 가득찼던 머릿속을 좀 비우고 싶었던 것이 유일한 이유였지요. 누군가는 생각이 필요해서, 또 생각을 정리하러 그 길을 간다했지만 저는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가 유일한 목적이었고, 매일 15kg이 넘는 배낭을 메고 땡볕 아래 20km를 넘게 걷고있자면, 정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소정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지요. 그것만으로도 괜찮았습니다. 내 생각인지 남의 생각인지 모를 것들로 가득찬 마음을 비워내는 것만으로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것 같았거든요.
<노란색 화살표를 따라 길을 갑니다. 삶의 코너마다 저런 화살표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 길을 떠나고 나서야, 한달 반의 시간동안 800km 길위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과의 인연, 또 그들에게서 얻은 이야기들로 그 비워진 마음이 오롯이 채워졌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카미노에서 얻은 것들이 문득문득 제 인생에 질문을 던지고, 지금 서있는 현실의 길 위에서 그 의미를 되새기고 알아가고 있기도 합니다. 요즘은, 그 길위에서 누군가가 나누어 준 ‘카미노의 처음 1/3은 몸이, 그 다음 1/3은 마음이, 그리고 마지막 1/3은 영혼이 괴롭다’라는 말이 종종 생각나는데요.
전날의 피로를 고스란히 안은 채 어스름한 아침녁에 눈을 뜨고, 작은 커피 한잔과 비스켓으로 오늘을 그려보면서, 물집 잡힌 발로 다시 길을 나서야하는 카미노의 여정은 생각만큼 그렇게 낭만적이지만은 못합니다. 생전 해본적 없는 생고생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안 아픈곳이 없고, 매일이 새로운 도전이고 어려움이지요. 자신의 체력을 과신하고 왔다가 발의 근육이 찢어져서, 무릎이나 허리가 더 이상 버티지를 못해서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돌아가야만했던 사람들도 보았습니다. 적게는 4-6명에서 많게는 50명이 넘는 인원이 한 방에서 자야하는 것은 물론 신선한(?) 경험이지만, 매일 반복되다보면 피곤에 지친 몸을 누이고 조용히 쉴 수 있는 공간이 없다는 것도 피로도를 높이는 요인이 됩니다.
이 새로운 생활에 적응이 되어 아침에 눈뜨면 몸이 자동으로 움직여 하루를 채비하고 길을 나서는 정도가 되면, 슬슬 마음이 무거워지기 시기가 옵니다. 괜히 가족들도 보고싶고, 친구들과 수다도 떨고싶고, 반복되는 일상도 지루하고, 길위에서 먹는 입이 마르는 음식들에도 무료해지지요. 마땅히 다른 할 일도 없고, 손에 쥐고 있는 적은 여행 경비는 나를 더 작아지게 만들고요. 체력이 받쳐주질 못해 카미노를 완주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갔다면, 두번째 단계에서 돌아가는 사람들은 이 생활에 넌더리를 내고 떠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어찌어찌하여 카미노 길의 마지막에 올라설 때 즈음에는 몸도 마음도 이미 이 생활에 적응된지 오래이고, 매일 한발짝 산티아고에 가까워지는 것이 반갑기도 또 한편 아쉬워지기까지 합니다. 그동안 지나온 길, 앞으로의 길, 또 이 길을 떠난 후의 나를 그려보며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무슨 의미였고, 나는 이것을 어떻게 가져갈 것인지를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지요.
어쩜 이 과정이 우리의 일과도 이렇게 많이 닮아있는지요. 일에 적응하느라 많이 부딪히고 몸이 고된 시간을 거치고나면, 그 일 안에서 만족과 실망, 성취와 아쉬움같은 오만 감정을 겪으며 그 일이 비로소 내것이 되어가지요. 그렇게 손에 익은 일에 나의 마음이 얹어지면, 그 다음에는 큰 그림에서 나의 일을 바라보며 그 의미를 찾으려고 합니다. 카미노의 그 길처럼, 몸과 마음이 고된 시간을 지나 내 일을 영적으로 고민하게 되는 그 과정까지 가면서 하나의 일을 종주하게 되는것이지요. 넓게 보자면, 하나의 인생도 그렇게 몸과 마음, 정신이 단단해지는 시간을 거쳐 여물어가는것 같고요.
10년의 경력을 만들고, 그 다음의 것들을 계획하고 만들어나가는 요즘, 저는 마지막 단계의 고민들을 많이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신없고 혼란스럽고 몸이 바빴던 시간들을 지나, 이제 그 시간을 통해 얻은것들로 앞으로 내가 하고싶은 것은 무엇이고, 어떤 의미를 만들고 싶은지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어요. 또,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졌음과 동시에, 제가 보낸 시간과 경력에 책임감을 느끼기도 하고요. 그렇게 하나의 일을 마무리하고 완성시키면서, 그 다음 길을 또 준비하는것 같습니다. 새로운 일을 마주하면 또다시 몸과 마음이 괴로운 그 시간을 거쳐가며 성장할테니까요.
<강렬한 스페인 햇빝에 맞서 새까맣게 그을린 제 모습이 종종 그리워요 :)>
길은 힘들었지만 마침내 산티아고에 도착했고, 다른 길은 그곳에서부터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800km의 짧지 않은 길도 제 인생 여정에서 보자면 한 토막에 불과했고요. 특별한 시작점도 끝도 없는 길 위에서 묵묵히 걷고, 속도를 내기도 하고, 잠깐 쉬어가기도 하고, 좋은 사람들 만나 같이 걷기도하면서 그렇게 내 몫의 여정을 만들어 보자고, 한발짝 더 가느라 조급했던 제 마음에 다시금 말을 걸어봅니다.
삶의 여정 안에서 진정한 여행자가 되어, 많이 경험하고 느끼고 즐기며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고생만큼 그 여행을 풍성하게 하고 두고두고 추억하게 만드는 것이 없으니, 힘든 시간도 기꺼이 마주하여 경험해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Buen camino! (좋은 여행되세요!)
Be Wodian,
Jinn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