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기억이 정확하다면, 7월 중순의 장마와 무더위가 막 시작되던 바로 이 지점 같아요. 2011년, 수박을 잘개 쪼개 내어 그릇에 담아 시원한 물 한잔을 함께 가지고 와서 책상앞에 앉았습니다.
그날, 제게 저는 저에게 마지막 선언을 합니다. 그 책상 앞에서 고치고 고치던 제 영문 이력서와 커버레터. 이번 여름을 기점으로, 더 이상, 더 이상 이 짓을 하지 않으리라. 외국을 동경해서 꿈을 꾸는 것도 좋고, 새로운 경력을 쫒아 용기를 내는 것도 좋지만 현실의 발이 바닥에 닿지 않아 늘 무엇을 쫒아, 지금을 만족 못하는 것도 지긋지긋하단 생각이 들때였지요.
마지막 장전, 마지막 발사.
그리고 나의 총알이 과녁에 맞든 맞지 않든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고, 쏠 수 있는 총알을 다 썼다면 그 결과가 어떻든 저는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더이상 ‘내가 부족했나? 조금 더 해볼걸 그랬나?’ 라는 망령같은 자괴감에 사로잡히지 않을 것 같았거든요.
그리고 되든 안되든, 영문 이력서를 업데이트 하면서 저는 싱가폴로 여름 휴가를 가는 비행기표를 끊었습니다. 아무것도 확정된것도 없지만, 유일하게 제가 휴가를 낼 수 있는 기간은 8월 20일 정도 모두다 휴가를 다 갔다 복귀하는 시점에서 단 며칠 뿐이었어요. 그때만이 제가 낼 수 있는 ‘최선의 시간’이었어요. 잡 마켓에서 나에게 그때 맞춰진 인터뷰를 줄 지 안 줄지, 아니 그 전에 준비중인 이력서가 통과 될지 안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8월 말에 싱가포르로 휴가를 간 김에 인터뷰를 보고 오겠다는 계획은 사실 허무맹랑한 상상에 불과했을지도 모르지만요. 내가 내게 줄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주고, 다 털고 오고 싶었어요.
‘ 자 봐봐, 쟈스민. 나는 네게 모든 것을 해 주었어. 시간, 노력, 돈, 마지막 기회. 이번 도전으로 잘 되면 너무나 감사한 일이지만, 되지 않아도 깃털같은 후회도 없기를 바란다. 알겠지?’
제가 뜨거운 2011년의 7월을 보내면서 제가 수도없이 말을 걸었고, 확신을 받았던 셀프 토크의 내용이예요. 그리고 정말로 저는 그때 해외 취업이 안되면, 한국에 완전히 정착해서 직장생활을 하고 사랑하는 파트너를 만나 안정감을 추구하며 살 생각이었지요. 일말의 후회도 아쉬움도 정말 하나 없이요.
그런데, 그 7월 이후 정말 신기하게 일이 저의 뜻대로 움직여 주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상상도 못했을 법한 회사에서 세일즈, 서비스 팀과 함께 강의와 코칭을 할 사람을 뽑고 있었고 마치 그 자리는 반년 동안 공석이라 싱가폴 시장에서 찾고 찾다가 한국까지 그 범위를 막 확대하고 있었던 시점이었지요. 그쪽 HR에서 비자 서포트를 하는 조건까지 고려해서 후보자를 만나보겠다고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회사 입장에서는) 인터뷰 시간을 위해서 비자가 없어도 무조건 싱가포르에 주둔해 있는 사람을 선호한다는 말에, 8월 말에 끊어둔 비행기표 이야기를 하며 그때 정도에만 인터뷰 시간을 맞추어 준다면, 시간에 상관없이 인터뷰가 가능하다고 설득을 했지요. 결국 그 쪽 회사에서 그 쯤에 가능한 인터뷰를 맞추어 주었고, 마치 테트리스의 블럭들이 빈 공간을 찾아가듯 제가 원하는 조건의 회사, 복지, 조건, 일의 성격, 환경이 모두 맞는 회사를 만나 저는 2011년 11월에 회사로 부터 최종 계약 컨펌을 받게 되었습니다.
<2011년 여름. 이 사진은 싱가포르에서 첫 인터뷰를 하고 잠시 들렸던 상해에서 친구들을 만났을때네요.>
이 스토리가, 정확하게 지금으로 부터 6년 전 한국에서 시작된 이야기예요. 6년전, 그때의 그 용기 혹은 마지막 도전으로 2012년 부터의 싱가포르 생활은 더이상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 됩니다. 그렇게 오게된 싱가포르에서 저는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중간에 비즈니스 스쿨로 옮겨 대학원생들에게 강의를 하고, 그리고 제 일과 사업을 만들어 교육 디자인 회사를 만들게 되지요.
싱가포르에 살면서 매해 7월을 맞이 할 때 마다, 수박을 잘라서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고 선풍기를 돌리며 이력서를 고치던 제가 너무도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해외취업이라는 꿈이 너무 달콤하지만 때로는 가시 같아서 그 꿈을 가지는 것 자체가 저의 온 몸을 따끔거리게 했던 연약했던 자아가 하나하나 생각이 납니다.
그리고 오늘. 6년뒤, 같은 시간 저는 인생의 역전 혹은 반전을 누리고 있는 중입니다. 2011년 7월에는 한국에서 싱가포르로 오려고 온갖 노력을 했는데, 이제 저는 싱가포르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을 가려고 준비 중이니까요. 딸린 식구 두명(?)을 데리고 말이지요. 인생의 계단을 몇 개 지나 오자, 그토록 떠나고 싶었던 한국이 이제 역으로 다시 꼭 돌아가고 싶은 둥지가 된 역설을 어떻게 설명할까요? 6년 정도 산 이 땅을 정리하고 새로운 인생의 챕터를 준비하는 이 시점, 제 마음안의 나비가 또 한번 팔랑거립니다.
6년이 지나 깨닫게 된 것 중에 하나는, 일의 조건이 해외에 있던, 국내에 있던, 취업을 하던, 창업을 하던, 학교이던 기업이던, 그 일이 정말 ‘나를 닮은 일인가’에 대한 궁극적 질문이 가장 중요하고 뜨거운 질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일터의 자리가 회사 안이건 밖이건, 한국이건 외국이건, 혼자하건 팀으로 하건.. 그 모든 것은 얼마든지 유동적이고 그 ‘조건들은 창출’ 될 수 있지만, ‘일의 속성을 사랑하는 나’를 변환 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지난 6년동안 배우게 되었어요.
그때 당시 제가 운이 좋게 해외취업이 술술(?) 잘 풀렸던 비밀도, 정말 처음으로 그때 제가 하고 있던 일이 저를 설레게 하고 기쁘게 하던 ‘저의 성격, 특성, 내성을 닮은’ 교육과 코칭을 다루었던 일이기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이제야 듭니다. 그것이 맞으니, 다른 조건은 어렵지 않게 풀렸던것 같아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문들이 다 하나씩 열렸지요.
다시말해 입사, 이직, 퇴직, 해고, 창업, 동업등 인생의 주기만큼 다양하게 맞이하게 될 일의 곡선에서 유연하게 수영하고 헤엄쳐갈 능력은 내가 어떤 수영복을 입고 있느냐, 어떤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느냐 보다도 ‘나는 정말 수영을 사랑하는가? 오늘 나의 진짜 수영실력은 어떠한가?’로 가장 설득력있게 자문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6년전 그때 처럼, 오늘 이렇게 수박을 잘라 책상에 앉아 또 미래를 설계하고 내 일로 어떻게 감동을 줄까? 어떻게 설득을 할까 고민합니다. 앞으로 6년 후에 저는 여전히 같은 질문을 하는 ‘일하는 사람’ 이겠지요.
싱가포르에서 짐을 싸며 불어난 식구들과 함께할 한국에서의 새로운 삶을 즐겁게 그려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자리에서, 실험과 시도로 조금씩 저의 반경을 넓혀보려고요. 그곳이 싱가포르, 한국, 제 3국 어디라도 이제는 해볼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가지게 된 것 같아 참 감사합니다.
무더운 여름, 오늘 새로운 시작과 마음을 도와줄 시원한 수박 한쪽 드셔보는 것은 어떠세요?
Be Wodian,
Jasm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