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에 이사 선물로 화분을 하나 받았습니다. 지름 30cm 정도에 높이 15cm 정도 되는 꽤 무게가 나가는 베이지색의 화분에는 화분 높이 정도로 길게 쭉 뻗은 초록색 식물(?!)과 낮은 키의 녹색과 적색이 섞인 식물이 함께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각각의 식물이 어떤 것인지 이름이나 물 주기 등의 정보는 함께 오지 않아서, 적당하게 햇빛을 쐬어주고 물을 주면 잘 자라겠지 하고 막연하게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반려식물을 키워본 적 없는 식알못 주인을 잘못 만난 초록이, 빨강이들은(이름을 지어 붙여주었습니다.)저의 터프한 관리에도 불구하고 씩씩하게 죽지 않고 잘 자라주었습니다. 나름 영양에 도움이 될까 쌀뜨물로 물을 주고, 커피 찌꺼기로 만든 흙을 뿌려주기도 하고, 잎에 먼지가 쌓이지 않게 닦아주기도 하면서, 애지중지까지는 아니더라도 같이 사는 파트너로의 역할을 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해를 많이 보여준 날에 초록이와 빨강이의 상태가 미묘하게 다른 것이 느껴졌습니다. 빨강이는 양껏 쐔 햇빛에 그제야 신이 난 듯 보였고, 초록이의 잎은 기미가 올라오듯 검은 점이 진해지는 게 어떤지 불편해하는 것 같았습니다. 보통은 거실 안 쪽에 자리 잡고 있는 화분인지라 햇빛을 듬뿍 쐬어주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미세먼지가 없는 맑은 날 창을 활짝 열고 창가에 화분을 올려두고 출근하곤 했었거든요.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돌아온 저녁에 본 초록이와 빨강이는 미묘하게 다른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그제야 아차 싶었던 저는 뒤늦게 초록이와 빨강이의 진짜 이름을 찾기 위해 검색을 했습니다. 그제야 알게 된 초록이의 진짜 이름은 ‘크루시아’였고, 빨강이는 피토니아 중 빨간 잎이 매력인 ‘핑크스타’였습니다.
공기정화식물로 인기 있는 초록이 크루시아는 10일에 1회의 물 주기를 가지고 있고, 음지를 좋아해 직사광선을 쬐면 마치 화상같이 잎이 거뭇해지는 식물이었습니다. 반면 핑크스타는 2~3일에 1회의 물 주기를 가진 물을 많이 좋아하는 친구였으며, 햇빛도 참 좋아해서 특유의 붉은 잎이 되려면 해를 많이 보아야 하는 식물이었습니다. 이름만큼이나 좋아하는 환경도 성향도 다른 두 식물을 한 화분에 같이 두고 있었다니, 너무 미안한 마음이라 둘을 따로 잘 자랄 수 있도록 분갈이를 해주기로 했습니다. 비교적 덩치가 크게 잘 자란 크루시아는 원래의 화분에 두고, 기운 없이 축 쳐져있던 핑크스타를 다른 화분으로 옮기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렇게 몇 달 지난 오늘, 별거 아니지만 별거였던 이 과정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점을 레터를 통해 전달드리고자 합니다.
너의 이름은?
워디랩스는 워크디자인의 프로세스를 4S로 설명하고 있는데요, 첫 단계는 나를 아는 SEED(씨앗), 그다음으로는 나의 SEED가 뿌리내려있는 SOIL(토양; 직장, 업계)에 대한 제대로 된 탐색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만나는 일에 대해 고민하는 분들 가운데에는 일단은 직장에 뿌리내리긴 했는데, 그 안에서 싱싱하게 살아있지 못하고 왠지 모르게 시들시들한 분들도 계셨습니다. 나는 정말 열심히 하고 있는데 지속적이고 치명적으로 의욕이 꺾기게 만드는 환경의 토양에 심겨 있는 경우, 나의 조직, 업계는 이러한데 그렇다면 나는 적합한 씨앗인지, 혹시 잘못 심겨 있는 것은 아닌지, 나의 이름을 다시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저의 경우 이전에 광고 업계에서 일을 했을 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업무 자체는 능숙해져 가지만, 미친 듯이 일이 좋기도 싫기도 하면서 뜨겁게 달려드는 느낌 없이, 말 그대로 하루를 ‘보내며’ 시들시들했던 적이 있습니다. 큰 그림을 그리며 더 재미있게 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분명 있을 텐데, 나는 아닌 것 같은 마음에 조직에도 죄송한 마음을 항상 품고 일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식물도 몸살이 난다
그러면 다른 화분으로 분갈이(=이직)를 하면 될까요? 어떤 경우 그것이 답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꼭 필요한 마음의 준비가 있습니다. 초록이 크루시아를 두고 빨강이 핑크스타는 새로운 화분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새로 만난 토양은 오랜동안 영양분을 빨아들였던 토양보다 더 풍요로운 흙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열흘이 넘게 핑크스타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오히려 더 축 쳐져 있었습니다. 어디가 잘못된 것인지 알아보니, ‘식물도 분갈이를 하면 몸살이 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곳에 적응하고 뿌리내리는데 식물도 심하게 몸살을 앓는데,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리 꿈꾸던 곳으로의 이직이라 할지라도, 새로운 조직, 출근길, 동료, 용어, 문화 등이 확 변화한 토양에서 한 번에 적응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게 앓게 되는 몸살을 잘 이겨내기 위해서는 내가 몸도 마음도 건강한 상태일 때 움직이는 것이 도움이 되겠지요.
싹이 나려면 기다려야 한다
분갈이를 하고 나서 약 한 달 반이 지나고. 이제야 빨강이 핑크스타가 심긴 화분이 정리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결국 몸살을 이겨내지 못하고 바싹 말라버린 친구들이 먼저 떠나가고, 남은 친구들 중 반은 이전 보다 더 튼튼하게 자라는 모양새지만, 반 정도는 길게 뻗었던 잎을 우수수 떨어뜨리고 줄기만 남고 말았습니다. 처음에는 떠나버린 친구들을 따라가는 줄 알고 무심하고 무지한 식알못을 만나 고생하게 만들었다며 이만저만 슬펐던 게 아닙니다. 그런데 일주일 전부터, 잎 하나 없던 줄기에서 다시 새롭게 싹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줄기의 틈을 어렵게 벌리고 나온 싹은 새로운 흙을 만나 새로운 방향으로 잎을 내밀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빼꼼히 내민 싹을 보았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ㅠㅠ
심한 몸살로 황량했던 핑크스타가 새 보금자리에서 이렇게 싹이 나기까지 의외로 많이 필요했던 것은 ‘시간’이었습니다. 씨앗이 흙에 심겨 싹을 내는 것은 누구나가 알 수 있는 자연의 이치입니다만, 모든 씨앗이 싹을 내는 것은 아닙니다. 이게 가능할까 싶어도 꾸준히 물을 주고, 해를 쬐어주고, 살피는 일을 공을 들여할, 생각보다는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일을 하다 보면 눈 앞에 어떠하게 보이는 것이 없다고 성급하게 판단해버리는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의외로 싹은 쉽게 나오지 않으니, 생각보다 긴 시간을 들여 꾸준히 해야 한다는 것을 핑크스타의 작은 싹을 보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렵게 나온 싹이 다시 풍성한 잎이 되기까지도 정성스러운 돌봄의 시간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것이겠지요.
푸르른 녹음과 화창한 하늘이 반겨주는 6월, 일주일간의 고군분투를 마무리하고 주말을 맞이하실 모든 워디독자 분들이, 비옥한 흙에 뿌리내린 튼튼한 싹이 좋은 열매로 이어지는 일의 결실을 맛 보시기를, 또 그 긴 커리어의 여정에 워디랩스가 다정한 친구가 되어드릴 수 있기를 바라며 이 레터를 보냅니다.
Be Wodian,
Ellie